오늘날 우리는 매일 같이 인공위성에서 쏘는 GPS의 덕분에 휴대폰에서 정확한 위치를 알고 이를 이용해서 내비게이션이나 스마트폰 지도를 정확하고 편리하게 사용한다. 그런데 이 GPS를 보정하지 않으면 하루에 10km이상(시간이 누적될수록 수십 km까지)의 엄청난 오차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적다. 이처럼 GPS 위치를 반드시 본정해야 하는 핵심 이유들을 AI가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GPS는 위성에서 발사한 전파가 사용자(수신기)에게 도달하는 '시간'을 측정하여 거리를 계산합니다. 빛의 속도(3 x 10^8 m/s)로 움직이는 전파를 이용하기 때문에, 단 1백만 분의 1초(1微秒)의 시간 오차만 생겨도 약 300m의 거리 오차가 발생합니다. 이 오차를 유발하는 주된 원인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상대성 이론에 의한 시계 왜곡 (가장 치명적인 원인)
2. 대기권(전리층 및 대류권)에 의한 전파 지연
3. 위성 궤도의 미세한 오차 및 위성 시계 자체의 오차......“
나는 이미 물리학을 스스로 많이 학습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 사실이 놀랍지는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물리학의 법칙으로 이용해서 GPS를 보정해야 인공위성이 정확한 위치를 우리에게 알려준다는 사실에 세삼 새롭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인생도 이 GPS 항법 장치처럼 위치 보정을 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니다. 본질적인 질문을 다시해야 겠다. 인생에도 GPS가 있을까? 이 질문이 우리에게 더 유익하다는 생각이 이야기의 방향을 바꾸게 하듯이 우리는 끊임없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인든 우리 자신 스스로에게 매 순간을 이런 질문하는지도 모르겠다. 단언컨대 우리의 인생에도 이런 GPS 항법 장치가 있다고 단언한다.
인생의 GPS를 보정하지 않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인공위성에서 쏘는 GPS를 보정하지 않으면 수십 km의 오차가 나듯 우리 인생의 길도 그런 오차로 항행하며 죽음을 향해 달려가지 않을까하는 의문은 당연히 누구에나 들어야 정상인데 인공위성의 GPS가 보정을 한다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것처럼 인생의 GPS를 보정해야 정확한 인생 궤도를 달려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라는 것을 일상 생활에서 너무나 많이 보아서 나는 실감 정도가 아니라 머릿 속이 복잡해서 외출하기가 겁날 정도이다.
그렇다면 정말 행복으로 가는 정확한 GPS가 있을까? 앞에서 내가 단언했듯이 있다. 즐거움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면 살 수는 없다. 맛있는 고기를 먹으면 기분이 좋고 행복하다고 해서 그 행복을 지속하기 위해서 돈이 아무리 많아도 계속해서 그 고기를 구어먹을 수는 없지 않는가. 우리는 순간적인 즐거움을 행복으로 알고 있다. 그 말이 정답이라고 해도 그 길로 가면은 곧 중독의 길로 가는 길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위에서 고기를 예를 들었지만 술, 담배, 마약, 섹스, 음료수, 과자, 피자, 치킨 등 등이 우리 주변에 널리고 널린 것이 모두 즐거움 덩어리들이다. 이 즐거움들을 지속하려면 계속 이 것들을 먹고, 마시고 행동해야 한다. 먹는 것도 한계가 있고 마시는 것도 한계가 있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위장과 신체 구조상가 먹고 마시고 행동하는 것 자체에 한계를 짓는다. 섹스가 즐겁다고 매일 같이 매 순간마다 섹스를 한다면 그 사람은 아마 얼마가지 못해서 체력과 정신이 고갈되어서 황천길을 예약하는 지름길이다. 이 정도로 이야기하면 대충 인생의 GPS를 보정해야한다는 생각이 들어야 정상이다. 인생의 GPS를 보정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다음에 이야기하는 지름길이다.
인생의 GPS를 보정해서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리고 그 행복한 길에서 매 순간이 즐겁다면 여러분은 그 길을 선택하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 보정의 방법은 무엇일까? 휴대폰에서 길을 안내하는 지도앱을 우리는 종종 사용한다. 우리는 낮선 길을 찾을 때 한 번쯤은 이 지도앱을 사용해보았으리라. 왜 이 지도앱을 사용할까. 너무나 상식적인고 단순한 질문이지만 중요한 질문이다. 결론적으로 이 지도앱을 사용하는 것은 첫째로 길을 몰라서이고 둘째로 모르는 길을 빨리 찾아서 그 찾는 위치에 도달하고 싶어서 이다. 인생에도 길이 있다.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그 길이 있다. 마른 길도 있고 젖은 길도 있고 수렁도 있고 운치있는 길도 있고 수없이 많은 길이 있다. 그 많은 길 중에서 행복한, 지속적인 행복의 길은 단 한 곳만이 있다. 그 행복의 길을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인생의 GPS라고 부르기가 너무 딱딱해서 인생의 지름길이라고 부르자.
지름길이란 순순한 한국 말이다. 한자가 섞이지 않은 전형적인 순우리말이다. 이 단어는 ‘질름’에 ‘길’을 더한 말이다. 우리 조상들은 원의 한가운데(중심)를 똑바로 가로지르는 선을 ‘지르는 선’이라고 불렀다. ‘가위로 지르다’,‘논둑을 가로지르다’라고 할 때의 그 ‘지르다(짧은 거리로 똑바로 나아가다)’라는 동사에서 나온 명사형이 바로 ‘지름’이다. 나중에 수학 용어를 정비할 때, 이 순우리말 ‘지름’을 그대로 원의 지름으로 채택했고, 반지름은 그 절반이라 하여 ‘반지름’이 된 것이다. 같은 지점에서 목적지까지 가는 길에서 지름길은 직선이지만 원을 둘러가는 길은 원의 길이를 따라가므로 지름길이 둘러가는 길보다 빠르다. 이것은 우리는 직관적으로 누가나 알고 있다. 그런데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내가 앞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인생의 길 중에서 순간 순간 즐거운 행복의 길에는 지름길이 없다. 세상 사가 그리 쉬우면 재미도 없을뿐더러 세상이 복잡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너무나 당연하게 모두 행복한데 범죄가 일어날 일도 없고 의견 충돌이 있을 수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같은 가치관을 갖게되기 때문이다. 모두 순간 순간 즐거운 행복의 길을 같이 걷고 있을 터이니까. 조금만 더 읽고나면 행복의 길은 있다는 것을 확신할 것이다. 조금만 참고 따라와라. 행복의 길의 기초는 바로 인내력도 필요하다. 이 세상에서 거져얻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자본주의 본질이기도 하다.
왜 행복의 길에는 지름길이 없는지는 약간의 사색이 필요하다. 행복의 길을 찾는데도 많은 사색의 힘이 필요하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아니면 흔히 알고 있듯이 이 지구 상에서 성인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인 불교의 창시자 붓다, 기도교의 창시자 예수,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함마드들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행복한 사람들이고 신들이다. 그 들은 아마도 내가 말한 행복의 길을 살다가 죽었을 것이다. 예수는 죽는 순간에도 처절한 고통을 겪었지만 그 고통 또한 행복으로 승화한 인간이자 신이다. 내가 예수를 신으로 격상시킨 것은 기독교들 중심으로 따진 것이고 기독교도인들을 인격을 존중한다는 의미에서 신으로 부른 것이지만 무신론자인 나로써는 그냥 사람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야기의 편의상 그냥 성인이라고 부르자. 그것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간에 오해를 증폭시키지 않을 지름길이다. 이 성인들은 고행을 통해서 성인의 길에 접어든다는 것은 상식이니 이정도로 하겠다. 성인들조차 행복의 길로 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이 성인들은 직관력도 뛰어났고 언변도 뛰어났고 그리고 머리도 비상하게 돌아갔다. 그런 성인들조차도 행복의 길로 가는 길목에서는 지름길을 찾지 못했다. 하물며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의 길(행복의 길이라면 순간 순간 즐거우면서 보편적으로 부르는 행복한 인생을 사는 것이라고 정의한 것을 앞으로는 ‘행복’ 또는 ‘행복의 길’이라고 정의하자.)을 찾는데 쉬울 수는 없다. 일단 어렵지만 행복의 길을 찾으면 그 다음부터는 행복의 길을 영위하는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다.
행복의 길이 어려운 이유를 이제는 성인들의 예를 벗어나서 일상 생활에서 이 행복의 길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알아보면 모두 무릎을 치지 않을 수 없다.
어떤 사람이든지 지위 고하와 남녀노소를 가리킬 것 없이 어떤 일을 처음 시작할 때면 너무나 어렵고 힘들다. 당연한 것이 그 일이 우리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처음으로 세탁소업을 시작하려면 다림질을 배워야하고 수선하는 일을 배워야 하고 세탁하는 방법을 알아야한다. 그 세탁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처음이므로 낮설고 어렵다.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어렵고 기술도 터득해야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예를 들었지만 모든 일은 처음 시작할 때는 아무 것도 모르고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이 뒷받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이기도 하다. 그러나 너무나 절망적이지 않은 것이 여러분들은 엄청나게 어려운 난관을 해치고 커다란 일들을 이루었다는 것에서 위로를 받기 바란다. 지금이 여러분들은 어머니에게서 태어날 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태어났다는 것을 상기하면 얼마나 힘든 일을 해낸 것에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갓 태어난 아이는 울기만 한다. 본성만 있어서 필요한 모든 것을 우는 것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아이가 울면은 젖 먹을 때인지, 기저기를 갈 때인지 아니면 아파서 우는 것이지를 헤아려 대처를 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으로써 DNA의 작용으로 인한 것이다. 이 때에는 언어와 가치과이나 모든 것이 백지 상태인 것이다. 그래서 울음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 아이는 이 때부터 배우기 시작한다. 엄마의 향을 느끼고 엄마의 향에서 멀어지면 불안해 한다. 조금씩 자라면서 ‘엄마’라는 단어를 배우고 기어다니고 그리고 걷고 가족들과 대화하기까지 시간도 많이 걸리지만 부모와 아이간의 소통에서 부단한 노력이 들어간다. 수 많은 어려움과 노력의 결실로 지금의 여러분이 있다는 것을 상기해봐라. 백지 상태에서 여러분은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간단히 이야기해서 여러분은 모두 부자다. 발가벗고 태어났으므로 지금 가지고 있는 재산이나 물건과 먹고 자고 입고 하는 모든 것은 공짜이고 머리 속에 든 것 모두 거져 얻었으며 모두 남에게서 온 것임을 잊지마라. 지금의 여러분의 삶은 기적 자체이다. 수 많은 정자가 하나의 난자와 만나서 포태한 다음 앞에서 말한 과정을 통해서 지금의 여러분이 있는 것이다.
결론 적으로 무슨 일을 하든 지금 어떤 상태이든 여러분이 지금은
그 수 없는 어려움 끝에 서있다는 것을 상기하라. 무슨 일을 시작할 때 처음 백지 상태에서 모든 것을 배워서 지금까지 온 것을 생각하면 모든 일의 시작에서 오는 어려움은 어려움 축에도 속하지 않는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서 행복의 길로 가는 여정을 탐구하자. 첫째의 전제 조건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처음 하는 일은 엄청 어렵다. 그러므로 행복의 길을 가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두 번째로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첫 번째는 이제 다 이해했을 터이니 이 두 번째의 이야기를 해야겠다. 인간은 동물이다. 그래서 인간은 동물적인 본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간이 동물이지만 다른 동물들과 특별히 다른 점도 있다. 이 다른 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충 추려보면 세 가지 정도로 압축할 수 있다. 그 첫째가 불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이 것 때문에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이 문명이라는 것을 만들었다. 다른 동물들이 불을 다루키는커녕 불을 무서워 도망을 친다. 이 불로 인하여 인간의 뇌가 비약적으로 진화했고 결국은 다른 동물과 커다란 차이인 뇌의 크기를 증가시켰다. 야담으로 이 불로 인하여 식욕이 생긴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인간이 탐욕스러운 존재인지를 알게된다. 로마 시대 때에는 이 식욕 때문에 원로원들이 맛있는 음식을 먹고 토한 다음 다시 또 음식을 먹는 기괴한 행태를 벌리는 지경에 이르른다. 동물들은 절대로 포식하지 않는다. 포만감이 차면 동물들은 더 이상 사냥하지 않고 풀도 더 이상 먹지 않는다. 인간은 본능도 바꾸도록 DNA가 설계된 것이 아니라 진화한 것이다. 생각한다 고로 먹는다. 이것은 그냥 농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셰프 전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먹는 것에 대한 집착이 날로 늘어간다. 이런 부정적인 면 이면에는 문명의 토대가 된 결정적인 계기도 바로 이 불을 이용한 것이다. 다른 동물들과 또 다른 한 축은 도구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전자제품을 사용하는 오늘 날의 우리의 현실을 보면은 구지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을 말해야겠다. 사실은 내가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을 이야기 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이 세 번째이야기 때문이다. 그것은 가치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아주 중요하고도 다른 동물들과 극명한 차이점이 바로 이 가치를 창발하는 것은 인간이 아직까지도 AI와도 엄청난 차이를 말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세 번째 못지 않게 중요한 네 번째 다른 동물들과 또 다른 점은 바로 직관력이다. 아무리 뛰어난 AI가 창의력을 가진다고 해도 인간과 대등한 두뇌를 가질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이 직관력 때문이다. 이것은 창의력과 동시에 직관력은 뗄레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혼요하여 설명하기로 했다. 창의력이 인간의 능력으로 무장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 시발은 바로 화폐를 만들었을 때이다. 인간의 진화 과정에서 단시간에 폭발적 진화는 화폐를 만들기 전과 만든 이후로 극명하게 갈린다.
동물들에게 사과와 5만원짜리 지폐를 놓고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이지를 제안한다면 동물들은 당연히 사과를 선택할 것이다. 그들에게는 지폐는 그냥 쓰레기로 여길지도 모르겠다. 그 동물들에게 필요없는 것이기 때문에 추측하건데 길거리에 흔히 발부리에 걸리는 돌멩이 축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사과 1개와 오만원짜리 지폐 한 장을 놓고 고르라고 하면 인간들은 당연히 오만원짜리 지폐를 선택할 것이다.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아무리 사과 값이 올라도 현시세로 보건데 사과를 한 짝은 사고도 남을 가치가 있는 것이 이 지폐이니까. 여기서 내가 가치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에 주목할라. 가치를 아는 것이 인간이다. 바로 이것이 창발이다. 창의력인 것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보자. 내가 등산을 하다가 길을 잃고 산을 헤메고 있을 때 어느 사람을 만났다. 얼마나 헤멨는지 허기가져서 기력도 달리는 상태에서 또 다른 방랑자를 만났다. 그런데 그 방랑자가 사과를 먹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본 사내가 주머니에 있던 5만원짜리 지폐를 건네주면서 그 사과를 팔라고 제안했다. 사과를 먹던 그 사람이 자기도 언제 길을 찾아 첩첩 산중을 벗어날지 모랄 팔 수가 없다고 하자, 이 사내는 5마원짜리 한 다발을 줄테니 사과 한 쪽만 팔라고 다시 제안했지만 사과를 가진 사내는 거절했다. 내가 두 가지의 예를 들었다. 현대 사회에서 행복을 논할 때 바로 이 가치라는 것을 중심에 놓지 않으면 진전을 이루기 어렵다. 이 두 사례에서 보듯이 가치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가치는 상대적인 것이다. 아무리 금은보화가 인간사회에서 중요한 가치를 가진다고 해도 때와 장소에 따라서 가치는 달라진다. 가치를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르게 판정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모든 인간들은 착각을 한다. 돈이 많으면 잘살 것으로. 안타까운 이야기다. 돈은 본질적으로 보자면 통장의 잔고나 지폐 또는 동정에 불과하다. 그것은 추상적인 물질이다. 장소와 때에 따라서 달라진다. 진정한 의미의 창발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행복과 연결되는 비밀스러운 가치를 말해주겠다.
바로 창의력이다. 가치를 만들어내는 힘이 창의력인 것이다. 이것은 장소와 시간에 구애를 받지 않고 인간에게 내재된 것으로 훔칠 수도 없고 빼앗을 수도 없고 모방할 수도 없다. 근본적으로 창의력이 이런 성질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그 어떤 법칙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생각이기 때문이다. 내가 물리학을 조금 공부했다. 물리학을 공부하다보니 세상에서 돌아가는 모든 기기들을 다 설명할 정도가 되더라. 시작은 미미했다. 파인만 교수의 강의록을 읽기 시작하는데 매 처음 공리처럼 말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었다.
”모든 물질은 원자로 되어있다.“
글쎄, 요즘은 왠만해서는 모두들 대학 수준의 지식은 있으니까 이 파인만 교수의 말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파인만이라는 인물이 어떤 사람인지는 몰라도 그가 한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 이론에 의해서 인간의 구조를 물리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따지고 보자면 인간의 두뇌가 어떤 방식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원자 단위로 설명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 원자 단위로 설명한다고 해서 생각이 무엇이냐는 대답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인간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이 감정 역시 어떻게 해서 일어나는지를 원자 단위에서 설명한다고 해도 역시 감정이 무엇이지에 대한 답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원자 자체는 생각이 없고 기쁨과 슬픔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원소가 없을 뿐 아니라 물리학 법칙 어디에도 이런 인간의 생각과 감정을 계산하는 물리법칙이 없다. 생물학에도 이런 법칙을 설명하는 원리를 찾을 수 없다. 정의를 내릴 수도 없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이 생각 그 중에서도 창의력은 본인 이외는 그 누구도 알지 못하며 빼앗은 것은 더군다나 불가능하므로 이 창의력이야말로 가치를 창발하는 원천이자 이제는 재산이라고 불러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조금만 생각하면 이것이 왜 당연하지 금방 드러난다. 창의력 가지 사람도 자기의 생각을 타인에게 고유하려고 해도 정확히 전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언어는 수단이지 정확한 사실 전달을 할 수 없다. 그냥 생각을 모방하는 것이 언어의 한계이다. 천재적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죽음은 그가 위대한 상대성 이론을 수식으로 정리한 장방정식을 남겼지만 그의 가치관과 그가 가지고 있는 사고체계는 온전히 남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냥 죽으면 모든 것이 묻히는 것이다. 그래서 가치관과 사고체계의 구축이 행복에서 중요한 이유는 이런 가치관과 사고체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행복의 길 중에서 중요한 덕목에 속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힌다. 여기에 직관력까지 갖추어지면 천하무적 행복의 주단길이 깔린다고 단언한다. 그래서 행복의 길은 단시간에 이루어질 수 없다. 자, 이제 행복의 길의 총론은 이정도로 하고 본격적으로 각론으로 들어가서 실생활에서 사용할 행복의 길의 정석을 들여다 보자.
행복의 길을 찾는 것이 어렵다보니 전제 조건도 많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정할 수 없는 행복의 조건을 말한다면 바로 건강이다. 건강하지 않으면 행복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여기서 설와설래할 일이 한 가지가 있다. 정신이 먼저냐 아니면 육체가 먼제냐는 해묵은 논란을 하자면 행복의 길로 가는 방법론을 제시한는데도 제약을 받는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선은 건강이 먼저라고 나는 생각한다. 특벼한 케이스의 예를 들자면 스티븐 호킹을 거론해보자. 루게릭으로 제 신체도 가누지 못하는 사람이 우주에 대해서 관찰하고 사고 실험을 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내가 그 사람과 대화를 하지 않았으므로 알 수는 없지만 지적 유희는 바카스 한 박스와 바꿀정도의 기쁨과 즐거움을 준다는 것은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지금 말하고저하는 본질은 건강이기 때문에 다시 건강으로 돌아가자. 대충 이야기는 하고 있지만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대충 행복의 길이 어떠해야하는지 미루어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나 지식이 행복을 가져다 준지 않는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우리 입맛에 맞지 않는다. 그리고 시기적으로도 행복의 길에서 지금은 건강에 대해서 말할 때이므로 이 주제는 뒤로 미루기로 한다. 인간의 멸망은 아마도 핵폭탄으로 인한 전쟁보다 바이러스에 의한 멸망이 확률적으로 더 높을 것이다. 코로나19를 겪었으니 알 것이고 역사적으로 보아도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가 전쟁으로 인하여 사망한 숫자보다 훨씬 더 높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 사실은 과장이 아니다. 합성 생물학에서는 지금도 각 국의 곳곳에서 DNA를 창출하고 있다. 이 지역 연구소에서는 그 누구도 실험할 수 있고 새로운 DNA를 만든는 것은 누구라도 합성 생물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새로운 DNA를 만든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시간 관계상 이후의 이야기는 조만간에 올리기로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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