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 “지연아, 넌 어떻게 골라도 이런 것을 골랐냐.”
  3. “같이 골랐잖아!”
  4. “인터넷을 검색해서 다 알아봤다며.”
  5. “오빠도 좋다고 했잖아!”
  6. “이거 산 매장을 고른 것도 너잖아. 그 매장 직원들이 싸게 준다고 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어떻게 산 지 일 년도 되지 않아 고장이 나냐!”
  7. “오빠도 그 직원들이 신뢰감이 든다며 좋다고 했잖아!”
  8. “알았다. 그만하자. 그러나저러나 이 후덥지근한 날씨에 에어컨이 고장 나서 어쩌지. 주말 저녁을 완전히 망치게 생겼네.”
  9. “오빠, 더위는 선풍기로 달래고 영화나 보자.”
  10. 더위보다는 아내가 자기의 잘못은 은폐하고 바락바락 대는 것이 더 체감 온도를 끌어 올렸다. 그런 아내와 급작스러운 결혼한 것을 두고두고 곱씹게 했다.
  11. 가자지구 중심부 난민촌에 이스라엘이 공습하여 다수의 여성과 아동이 사망했다는 소식이 끝나자마자 아내는 영화 검색을 시작했다. 나는 소파에서 일어나서 작은 방으로 향했다.
  12. “오빠, 바둑 두려는 거 아니지?”
  13. “나도 숨 좀 쉬자!”
  14. “나랑 같이 영화 보자.”
  15. 나는 아내의 말을 무시했다. 한 번씩 말다툼하고 나면 아내가 카멜레온 같았다. 대화를 할 때면 지지 않으려고 바락바락 대들면서 자기가 필요하면 얌전한 척하는 것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내가 바둑을 두는 것을 극도로 싫어 했다. 그러나 나는 나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아내와 한바탕 난리굿을 치르니 집안의 온도 이상으로 날이 선 신경을 구겨진 옷을 펴듯 풀어줄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장마철 한복판에 에어컨이 고장이라니. 온몸이 찐득거린다. 선풍기도 딱 한 대다. 그 선풍기는 지금 아내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
  16. 컴퓨터 책상 의자에 앉아 자판기 전원 스위치를 켰다. 모니터에 결혼식 때 찍은 사진이 배경으로 나오고 아이콘들이 즐비하다. 온라인 바둑 사이트에 접속했다. 바둑에 몰입하면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다. 후덥지근한 날씨와 변덕을 부리는 신경을 잊게 해주리라. 오랫동안 마음을 비우기 위하여 대국 시간을 길게 잡고 싶었다. 역시 주말이라 대국실이 북적였다. 대국 신청을 했다. 잠시 뒤 상대방이 수락했고 대국방 화면이 떴다. 내가 백이고 상대방이 흑이다. 대국이 시작되었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상대방과 나는 비슷하게 중용을 취했다, 화점과 소목으로. 착점이 진행되면서 포석이 일단락되었다. 예측하기 힘든 포석이다. 그런데 우하귀에서 상황이 급박했다. 양쪽 모두 곤마가 생겼다. 결국 양쪽 곤마 모두 갇혔다. 수 싸움이 일어났다. 수를 세기 시작하는데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17. “오빠, 이리 와봐.”
  18. 나는 더 이상 아내와 대립하고 싶지 않았다. 계속 대국을 이어가려면 아내의 요구를 빨리 끝내야 했다. 나는 거실로 나갔다.
  19. “오빠, 저기 나방이 날아다녀. 어이구 징그러워.”
  20. 작은 나방 한 마리가 거실을 배회하고 있었다. ‘재빨리 잡아야 대국을 이어갈 텐데.’
  21. “우리 집에 전기 파리채가 없나?”
  22. “없지.”
  23. “웬만한 집은 다 하나씩 있지 않나?”
  24. “글쎄···. 오빠도 알듯이 친정집에서 내가 처음으로 독립한 것이 여기잖아. 그리고 결혼한 후 처음 맞이하는 여름이라 미처 생각지 못했네. 근데 파리채는 있는데.”
  25. “웬 파리채?”
  26. “지난번에 언니네 식구가 왔었잖아. 그때 조카가 파리 잡는다고 노상 가지고 다니다가 잠들어서 우리 집에 놓고 갔어.”
  27. “가지고 와봐.”
  28. 아내가 거실 서랍장을 열고 하늘색 플라스틱 파리채를 집어 나에게 건넸다. 파리채를 들고 나방을 주시했다. 이 나방은 보통의 나방과 달리 파리의 크기와 비견될 정도로 작았다. 또한 보통의 나방에 비하여 비행 속도가 빨랐고 파리처럼 자유자재로 유영하였다. 공중에서 떠다니는 이 놈을 파리채로 때려 바닥에 꼬꾸라지게 만들기로 했다. 이 녀석이 현관문 쪽으로 가자, 현관 센서 등이 켜지고 나니 거실 쪽으로 방향을 틀어 내 정면으로 날아왔다. 파리채로 이 녀석을 조준하고 휘둘렀다. 그러나 이 녀석은 빠르게 지나갔다. 이 녀석이 위험을 느꼈는지 재빠르고 불규칙적으로 거실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베란다 쪽 거실 끝에서 이 녀석을 향해 다시 한번 더 파리채를 휘둘렀다. 그때 내가 휘두른 파리채가 베란다 문과 소파 사이에 있는 거치대에 놓인 클래식 기타를 쳤다. 쿵쾅거리는 소리와 함께 이 악기가 거실 바닥에 나뒹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 아내가 이 광경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29. “오빠, 기타 망가진 거 아니야?”
  30. “글쎄, 점검해 봐야 겠다.”
  31. “고장 나면 안 되는데.”
  32. 이 기타는 우리 둘에게 중요하다. 연애 시절 아내에게 스킨쉽을 하고 싶을 때마다 이 기타로 연주하곤 했다. 기타 실력은 프로급의 실력은 아니더라도 아마추어 치곤 그런대로 잘 친다는 소리를 들었다. 내가 그것으로 연주하면 아내에게 감정이입의 시그널이 되어 아내를 세뇌시킴으로써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높이를 키웠다. 그래서 아내가 나뒹군 기타에 애착을 떠는 것은 계속 내 연주를 듣고 싶다는 속내이므로 긍정적인 신호다.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이 악기가 고가라는 것이다. 어찌하든 이 작은 벌레가 짜증나는 주말을 더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나는 기타를 집어 들고서 곳곳을 자세히 살폈다. 외관상으로는 특별한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소파에 앉아 기타를 튜닝해 보았다. 음계는 이상이 없었다. 한숨이 절로 났다. 지금은 정상적인 소리가 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충격을 받은 바디의 이음 부분이 약해지면서 터질 수도 있었다. 기타를 소파 옆 안마기 뒤에 놓았다.
  33. “오빠, 기타 괜찮아?”
  34. “글쎄, 두고 봐야 겠는 걸.”
  35. 이 녀석에게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기로 했다. 무더위와 더불어 이 녀석 때문에 스트레스가 한계치에 도달한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울분을 참고 침착하기로 했다. 이 녀석을 자극하면 할수록 잡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행동하기보다는 파리를 잡을 때처럼 벽에 앉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파리채 대신 전기 파리채로 잡았더라면 이 녀석은 이미 통구이가 되었을 텐데. 그렇게 똑똑한 척하는 아내가 집집마다 하나씩 있는 전기 파리채를 구비하지 않은 것이 더 두뇌를 가열시켰다. 이 녀석이 날뛰는 꼴을 한참을 보고 났더니 은근히 도전 의식이 느껴졌다. 거실을 휘젓던 이 녀석이 소파 위에 꽃이 그려진 유채화 액자의 유리 위에 앉았다. 그 유리가 깨질 것을 우려해서 살짝 치기로 했다. 파리채를 손목의 스냅을 이용해 녀석을 향해 살짝 때렸다. 녀석은 힘없이 소파 등받이로 떨어졌다. 대결이 너무나 싱겁게 끝나 허망할 정도였다. 녀석은 그 등받이에서 버르적거렸다. 나는 파리채로 녀석에게 한 방 더 갈겼다. 확인 사살이다. 녀석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나의 피해를 생각하면 녀석을 서서히 죽이고 싶었지만, 날랜 녀석을 잡기에도 급급했음으로 복수는 이 정도로 마무리할 수밖에 없었다.
  36. “지연아, 끝났어.”
  37. “오빠, 고마워.”
  38. 나는 의자에 앉자마자 수를 세기 시작했다. 우선 내 수부터 셌다. ‘하나, 둘, 셋, 넷.’ 그때 아내의 앙칼지고 다급한 목소리가 헤드폰 안으로 빨려 들어왔다. 짜증이 묻어 있는 걸음걸이로 거실로 나갔다. 나방 대여섯 마리가 거실을 자기들의 놀이터인 듯 휘젓고 있었다. 놀라운 사실은 베란다에서 두 마리가 거실로 날아오는 것을 보았다. 등줄기가 뜨끔했다. 땀띠라도 솟은 것일까? 물기가 등줄기로 타고 내려오는 것을 느끼는 중이다. 끈끈한 액체가 정신을 더 사납게 만들었다.
  39. “아무래도 안 되겠는데. 전기 파리채를 사와야 겠어. 녀석들이 점점 늘어나네.”
  40. “빨리 가자. “
  41. “근데 이 시간에 전기 파리채를 어디서 사지?”
  42. “그러게. 시간도 늦었는데. 다이소에 가면 살 수 있지 않을까?”
  43. 아내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더니 말한다.
  44. “열 시까지 영업하네. 지금이 여덟 시 오십 분이니, 시간은 충분하네.”
  45. “빨리 갔다 와.”
  46. “나 혼자서.”
  47. “나, 대국 중이야. 그리고 밤눈이 어두운 것 알면서. 차 타고 갔다 와, 바로 옆인데.”
  48. 두말없이 현관을 나서는 아내를 보고 나니 알 수 없는 희열이 느껴졌다. 나는 그 나방들이 두려울 것이 없으므로 두고 볼 수 있지만, 벌레를 무서워하는 아내는 견디기 어려울 것이므로 더 이상 나에게 딴지를 걸 수는 없었을 것이다.
  49. 나는 태연하게 의자 앉았다. 다시 수를 세기 시작했다. 막상 수를 세고 나니 양쪽 모두 한 집을 낼 수 있어 빅이 되었다. 다시 좌상귀에 걸친 돌이 수를 냈다. 그러나 수를 낸 대가로 바로 옆 변에 있는 내 말이 위험에 빠졌다. 그냥 살 것인가 중앙으로 세력을 붕괴시키며 삶을 도모할 것인가 망설이던 순간에 번호 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나갔다. 아내가 전기 파리채 두 개를 들고 현관에 들어서고 있었다.
  50. “뭐 하러 두 개씩이나 사오냐.”
  51. “혹시나 고장날까 봐.”
  52. 완벽주의자인 아내다운 행동이다. 그 성격 때문에 우리가 껄끄러워진 것을 아내는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시 아내가 소리쳤다.
  53. “오빠, 거실 좀 봐봐.”
  54. 뒤돌아 거실을 보니 십여 마리 나방들이 거실을 제 집인 듯 날뛰고 있었다. 혹시나 해서 작은 방을 보니 서너 마리가 이미 점령했다. 바둑에 몰두하느라 나방이 돌아다니는 것도 몰랐다. 녀석들은 무음 비행을 했다. 긴장을 자아냈다. 그러나 나방이 내 위로 날아다닌 것을 알았다고 한들 뾰족한 수도 없지 않은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안방으로 가서 등을 켰다. 그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나방들이 집을 완전히 점령했다. 안방, 작은 방 그리고 주방이며 거실까지.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땀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가는 감각이 무디게 전해져 온다.
  55. “지연아, 맥주 좀 가지고 와라.”
  56. 아내가 건넨 맥주를 따서 마시며 전투력을 키웠다. 아내에게서 전기 파리채를 건네받았다. 이젠 파리채가 아니다. 이것에 살짝 닿기만 해도 놈들은 타서 재 가루가 될 것이다.
  57. “지연아, 너는 소파에 앉아서 놈들이 네 쪽으로 오는 족족 휘두르기만 해. 알았지.”
  58. “무서워.”
  59. 아내는 벌레들을 유난히 무서워했다. 그래서 연애 시절 여름밤 야외에서 우리의 데이트는 늘 망치기 일쑤였다. 날벌레들이 한 마리라도 보이면 아내는 질겁을 했기 때문이다. 여름밤엔 스킨쉽의 스릴도 없이 카페에서 권태롭게 데이트를 해야 했다. 듬직한 남편을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 난 아내가 그 작은 생명체에 벌벌 떠는 꼴은 절로 웃음이 나는, 어쩔 수 없는 희극이다.
  60. “가만히 앉아서 휘두르기만 해.”
  61. 아내의 대답이 없다. ‘아내에게 나의 존재를 부각시킬 기회다.’ 나는 거실 한가운데 서서 사방을 둘러보며 잠시 탐색했다. 가만히 서서는 잡기 힘들다는 판단에 움직이면서 내 주위로 날아다니는 녀석들을 전기 파리채로 낚아챘다. 따다닥 하는 소리가 스테레오처럼 온 집안에 울려 퍼졌다. 아내는 그럴 때마다 신음 소리를 내면 머리를 가랑이 사이로 파묻었다. 쉴 사이 없이 휘둘렀다. 적어도 십여 마리는 바닥에 떨어졌을 것이다. 그 틈에도 내 후각은 고기가 타는 냄새에 민감하게 작용했다. 맥주를 먹은 후라서 인지 그 냄새가 안주처럼 느껴졌다. 온몸은 이미 땀으로 포위됐다. 이 습한 공기가 머리 안까지 타 들어왔다. 다시 갈증이 일었다.
  62. “지연아, 맥주 좀 갖다 줘. 그리고 텔레비전 좀 꺼. 정신 사납다.”
  63. 나는 거실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녀석들의 사체를 물끄러미 내려 보았다. 이상한 점이 눈에 들어왔다. 무늬는 같은데 큰 녀석도 있었고 작은 녀석도 있었다. 작은 녀석은 큰 녀석에 비하여 반 정도의 크기였다. 아마도 녀석들이 시간이 지나면 점점 자라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것은 내가 녀석들의 정체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웅크린 자세로 은색 냉장고에 다가가다가 나방 한 마리가 옆으로 쏜살같이 지나가자 “앗!” 소리를 내곤 주저앉았다. ‘똑똑한 척은 다하면서 저까짓 것들이 뭐라고.’ 그러나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아내가 저 작은 미물에게 휘둘리는 것이 가여웠다. 두려움은 본능에 가깝지 않은가. 내가 그토록 좋아해서 따라다니며 구걸한 끝에 어렵게 결혼한 것이 떠올라 아내 곁으로 가서 안아 주었다. 아내가 놀란 것 같아 잠시 등을 토닥여 주었다. 마음이 진정되었는지 아내가 나를 안심시키려고 애쓴다.
  64. “오빠, 미안해.”
  65. “아니야. 지연아, 어디 카페라도 가 있을래. 내가 해결하면 전화할 게”
  66. 아내를 걱정하는 것은 진심이었다. 내가 아는 아내는 진실하고 상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혼 후 맞벌이와 가사로 힘들어했다. 그래서 아내는 살림살이를 반반 나눠서 하자고 제안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아이를 갖자는 역제안했다. 진정한 가족이 되려면 애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내 지론이다. 그러나 아내는 지금도 힘든데 아이를 낳아서 어떻게 키울 것이냐, 아이를 낳으면 경력단절여가 되는 거 아니냐, 아이를 키우려면 삼억이나 돈이 든다는데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고 질문을 퍼부으며 내 조건을 거절했고 나는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 후로 아내와의 마음의 거리가 호르무즈 해협의 직통로에서 희망봉으로 돌아가야 하는 고난의 길로 빠졌다.
  67. “아니야, 오빠. 벌레가 징그럽게 두렵지만 오빠 혼자 있게 하고 싶지 않아.”
  68. 이 나방이 우리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있지만 아내와 나의 과거를 회상하게 한다. 그 나방 때문에 연애 시절처럼 서로를 보듬고 있지 않은가?
  69. “그럼, 소파에 가만히 앉아 있어.”
  70. “응.”
  71. 나는 은색 냉장고에서 맥주 하나를 꺼내서 마셨다. 더위가 좀 가시는 듯했다. 내가 너무 들쑤셨는지 녀석들이 빠르게 곡예비행을 하며 헛손질이 늘었다. 세 번 휘둘러야 한 마리를 잡았다. 이상한 것은 적어도 삼십 마리 이상은 잡은 것 같은데 도무지 이 녀석들의 수가 줄지가 않았다. 잠시 제자리에 서서 어디에서 녀석들이 오는지 잠시 관찰했다. 그곳은 베란다였다. 나는 베란다 등을 켜고 그곳으로 나갔다. 베란다를 죽 훑었다. 이미 그곳도 십여 마리의 나방들이 여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었다. 안방 옆 베란다에는 세탁기와 그 위에 두 개의 선반이 있었다. 선반에는 잡동사니들로 꽉 들어찼고 반대쪽 편에는 보일러 옆에 쌀독이 있으며 그 옆에는 투명 플라스틱 그릇들이 잔뜩 쌓여 있다. 그 어디에서도 나방들이 날아오는 광경을 볼 수 없었다. ‘원인을 알아야 사건의 해결이 쉬운 법인데.’ 어느 곳에서 나방들이 몰려오는지는 결국 알지 못했다. 그 순간 얼핏 든 생각은 지금 보이는 나방 수가 우리 집 안에 있는 전부라고 판단했다. ‘이젠 사십여 마리만 잡으면 끝이다.’ 주말의 평온을 되찾으려면 빨리 없애야 했다.
  72. 다시 거실로 가서 상황을 살폈다. 에어컨 밑에 한 마리, 액자와 베란다 문 사이에 한 마리 그리고 현관 쪽에 붙어 있는 싱크대 수납장에 한 마리가 앉아 있다. 먼저 나에게 제일 가까운 에어컨으로 살며시 다가갔다. 전기 파리채를 나방 위에 포갰다. 나방이 전기 파리채의 위로 날지 않고 살짝 각도가 벌어진 틈으로 옆으로 빠져나갔다. 아쉬웠고 우둔했다. 그러나 큰 교훈이다. 완전히 벽과 밀착하고 잠시 나방이 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번엔 소파 위의 액자와 베란다 사이 쪽으로 접근해 전기 파리채를 나방 위에 살포시 포갰다. 그렇게 잠시 멈췄다. 나방이 움직이질 않는다. 벽에 댄 전기 파리채를 약간 벽에 붙인 채로 오른쪽으로 밀어 전기 파리채 망을 지지하는 플라스틱 틀로 나방을 건드렸다. 나방이 날다 망에 걸려 불꽃이 튀겼다. 싱크대 수납장 위에 앉았던 나방은 날아가고 없었다. 앉아 있는 나방이 없어 날아다니는 나방을 잡기로 했다.
  73. “지연아, 선풍기를 가지고 안방으로 가 있어. 우선 거실 쪽을 정리해야겠어.”
  74. 나방들과 실랑이하는 동안 계속 신경 쓰이는 것이 선풍기였다. 그것 때문에 운신하는데 지장을 받았었다.
  75. “알았어, 오빠.”
  76. 불규칙적으로 그리고 십여 마리가 사방에서 움직이므로 정신 차리기가 어려웠다. 나는 움직임을 멈추고 내 근방으로 오는 나방들을 향해 전기 파리채를 휘둘렀다. 앉아 있는 나방보다 잡기가 좀 수월했다. 나방이 망에 닿는 순간 타다닥 소리를 내면서 불꽃이 튀고 고기 타는 냄새를 풍겼다. 전기 파리채를 휘두르면 휘두를수록 나방들이 거칠게 날뛰며 비행했다. 아마도 나방들이 공기의 흐름을 어떤 기관을 통해서 감지하고 있는 듯했다. 내 근처로 오는 나방은 없었고 이 녀석들이 천정 근처로 비행고도를 유지하면서 춤을 추며 날아다녔다. 이제는 녀석들을 쫓아다니며 전기 파리채를 휘둘러야 했다. 놈들이 사정거리 이내로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소파 정면에 있는 텔레비전 쪽으로 발길을 돌려 그 위 천정으로 나는 나방을 향해 전기 파리채를 휘둘렀다. 전기 파리채에 섬광이 일었다. 텔레비전 옆에 놓인 검정 냉장고 위를 날던 녀석이 베란다 문에 막혀 다시 유턴하며 내가 서 있는 위의 천장 쪽으로 향해 날아오자 다시 전기 파리채를 휘둘렀다. 타다닥 하는 높은 파동이 내 고막을 자극했다. 거실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 보니 놈들을 공격하기가 수월했다. 좌우로 나방을 쫓아다니며 정신없이 천정을 보며 휘두르다 보니 계속해서 꺾인 목이 피로를 가중시켰다. 잠시 쉬어야 했다. 그제서야 알게 된 사실인데 옷은 땀에 흠뻑 젖어 제 기능을 잃었고 오히려 신경만 곤두서게 하였다. 나는 윗도리를 벗었다. 마저 남은 속옷을 벗으려 하는데 몸에 속옷이 달라붙어 벗는 것도 버겁게 느껴졌다. 팔에 힘을 주어 속옷을 벗었다. 순간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양팔은 허공을 갈랐다. 손에는 너덜너덜한 속옷이 들려 있었다.
  77. “지연아, 내 러닝셔츠 좀 갖다 줘.”
  78. “알았어, 오빠.”
  79. 나는 욕실 옆에 있는 은색 냉장고로 가서 맥주 하나를 꺼내 마셨다. 갈증이 가시면서 잠깐 몸에 냉기가 머금었고 조급함과 곤두선 신경을 가라앉히려 감정과 이성을 가다듬었다. 아내가 속옷을 내게 건넸다. 새 속옷을 입고 나니 조금 산뜻한 기분이 들었다. 진실이든 아니든 고분고분하게 내 지시를 따르는 아내를 보면서 희열을 느꼈으나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80. “지연아, 안방에는 나방이 아직도 있니?”
  81. “응, 아직도 두 마리가 날아다녀.”
  82. “두려우면 이불속에 들어가.”
  83. “나는 괜찮아. 오빠는 힘들지?”
  84. 아내의 말에 마음의 평화가 깃드는 것이 느껴졌고 오랜만에 감정의 물이 흠뻑 녹아든 것 같아 기운이 솟았다. 거드름이 솟구쳤다.
  85. “아니, 뭐 이 정도 가지고. 이놈들 무지하게 지독하네.”
  86. “그러게. 내 걱정은 말고 쉬엄쉬엄 해.”
  87. “알았어.”
  88. 아내가 안방으로 들어가고 나는 다시 녀석들을 탐색했다. 대여섯 마리가 무음 비행한다. 주방에 두 마리가 날더니 앉았다. 천천히 주방으로 걸어가서 유리장 옆 찬장 문에 앉은 나방에게 다가가 전기 파리채를 덮었다. 전기 파리채가 번쩍였다. 바로 옆에 있는 찬장 문에 붙은 나방도 바로 이전 녀석과 마찬가지로 맥없이 주방 바닥으로 낙하했다. 눈으로 사방을 주시하다가 주방 앞 작은 방을 보았다. 그 방안에 나방이 구름 낀 것처럼 희뿌옇다. 아뿔싸 거실에서 난리를 피우는 통에 녀석들이 그 방으로 날아 들어간 것 같았다.
  89. 나는 작은 방으로 재빨리 이동했다. 그 방에 들어서자마자 마구 전기 파리채를 휘둘렀다. 날카로운 소리와 번쩍이는 불티와 맛깔나는 냄새가 어우러져 연회가 베풀어지는 잔칫집을 연상케 했다. 책장이 있는 벽 쪽으로 가서 전기 파리채를 휘두르는 순간 무릎이 심하게 충격을 받아서 짧은 비명을 내지르곤 넘어졌다. 고통이 온 머리를 뒤덮었다.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널브러졌다. 내 외마디 비명에 아내가 달려왔다.
  90. “오빠, 왜 그래?”
  91. 나는 심한 고통으로 아내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아무 움직임 없이, 소리 없이 비행하는 녀석들을 응시한 채 한동안 누워있었다. 통증이 약간 가라앉았음을 느끼며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내 무릎과 맞닥뜨린 것은 자전거 운동기구였다. 나방에 시선을 빼앗겨 그것을 미처 피할 사이가 없었다. 갈수록 가관이다. 습도와 온도와 나방 그리고 통증까지 이 상황이 꼭 지옥 같다.
  92. “지연아, 파스 좀 가져와 봐. 무릎이 자전거의 몸체에 찧었어.”
  93. 아내가 작은 방을 나가더니 뿌리는 파스, 물파스 그리고 붙이는 파스를 두 손에 한 아름을 들고 왔다. 이제서야 아내의 참모습이 보였다. 아내는 참으로 영민했다. 나에게는 장점이자 단점으로 다가왔었다. 현명하니 일 처리는 깔끔했지만 작은 일에도 따지고 들면 귀찮았다. 그런 아내가 혼수 목록에 적시한 것 중 하나가 구급상자였다. 구급상자에 넣은 품목에는 파스도 있었는데 아내가 가져온 세 가지 파스 모두를 포함했다. 아내가 세가지 파스 모두 가져왔다는 것은 나에게 선택권을 부여했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내 의견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해석되었다. 이 나방들이 나와 아내를 하나가 되게 해준 것 같아 고맙기까지 했다. 그러나 해충은 해충일 뿐이다. 나는 뿌리는 파스를 아내의 손에서 집어 오른쪽 무릎에 뿌렸다. 통증을 즉시 가라앉히는 효과는 뿌리는 파스가 제격이었다. 두 손을 방바닥에 짚고, 오른쪽 무릎을 굽혔다 펴기를 반복해 보았다. 다행히 단순 타박상이었나 보다. 일어섰다. 약간의 통증이 느껴졌다. 그러나 행동하기에는 큰 어려움이 없을 듯했다. 다시 전기 파리채를 집어 들었다. 그때 아내의 말에 놀랐다.
  94. “오빠, 가만히 있어. 내가 한 번 이 놈들을 잡아볼 게.”
  95. “지연아, 개미한테도 질겁하는 네가 어떻게 저 녀석들을 잡는다는 거야. 내가 천천히 잡을 테니 나에게 맡겨.”
  96. “오빠, 이젠 이놈들의 만행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97. “정말 괜찮겠어.”
  98. “응.”
  99. 작은 벌레에도 그렇게 질겁하던 아내가 이렇게 마음을 쉽게 변하게 한 것은 서로를 위해주던 연애 시절 그 모습이다. 나는 그런 아내의 말이 나에게 사과한다는 말로 들렸다. 다만, 환청이 아니길 빌고 싶었다. ‘사랑하면 용기가 생긴다던데.’ 어찌하든 참으로 알 수 없는 묘한 일이다. 이 혼란한 상황을 수습한 다음 아내에게 물어봐야겠다, 그런 용기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그러나 나는 아내에게 그런 일을 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100. “혹시 모르니까, 우선 모기약을 뿌려보자. 모기약이 이 녀석들에게도 효과가 있을지 모르니까. 뿌리는 모기약이 있지?”
  101. “응.”
  102. “가지고 와봐.”
  103. 아내가 모기 살충제 들고 들어왔다. 나는 나방을 향해 모기 살충제를 뿌렸다. 뿌연 기체가 나방들을 덮쳤다. 나방들은 날뛰었다. 나방들을 쫓아다니며 녀석들을 향해 계속 뿌렸다. 나방들은 계속 날뛰었지만 바닥으로 떨어지는 녀석은 한 마리도 없었다. 오히려 나방들을 자극해서 더 날뛰고 흩어지게 할 뿐이었다. 이를 본 아내는 방을 나갔다. 잠시 후 방으로 들어온 아내의 왼손에는 전기 파리채가 들려 있었다. 아내는 왼손잡이다. 다급하다 보니, 야구로 따지자면 이젠 왼손잡이 타자와 오른손잡이 타자를 모두 갖추어 유리한 경기를 치룰 수 있으리라는 엉뚱한 생각도 해본다.
  104. 아내는 서툴게 전기 파리채를 휘둘렀다. 이 작은 방에서 아내와함께 전기 파리채를 휘두르기에는 방이 너무 협소했다. 나는 거실로 나와 천정을 탐색했다. 이제는 몇 마리인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수가 줄었다. 이젠 거의 끝나리라 예상하며 낮게 나는 녀석부터 잡기로 했다. 나의 옆선으로 날아오는 녀석을 목표물로 정하고 내 근처에 오자 전기 파리채를 휘둘렀다. 녀석은 유유히 내 뒤로 날아가고 나는 왼쪽 무릎을 꿇어야 했다. 오른쪽 무릎에 콕콕 찌르는 듯한 통증 때문이다. 오른쪽 무릎을 왼손으로 눌러봤다. 약간의 통증은 느껴졌다. 견딜 만했다. 다시 일어나 목표물을 정하려고 거실을 둘러보는데 베란다에서 나방이 거실로 들어온다. 한 마리가 아니다. 줄줄이 날아 들어온다. 금방 거실은 스무 마리 정도로 늘어났다. 조금 전에 이미 베란다를 살펴보기는 했으나 그곳이 수상쩍었다.
  105. 베란다로 다시 나갔다. 이번에는 베란다에 있는 물건들을 일일이 탐색하기로 했다. 세탁기 위에 있는 선반에 비닐로 씌워진 원통형 플라스틱 통의 비닐 막을 걷었다. 그곳에 작은 나방들이 바글바글했다. 나는 재빨리 전기 파리채로 막았다. 그 플라스틱 통의 넓이는 전기 파리채보다 작았다. 나오려는 나방들 때문에 폭죽이 연쇄적으로 터지는 것처럼 요란한 소리와 함께 전기 파리채 망에 섬광이 이어졌다. 한동안 이어지던 시끄러운 음향과 불꽃이 잦아들었다. 혹시 남아 있을지도 모르는 나방을 마저 소탕하기 위하여 플라스틱 통을 왼손으로 흔들었다. 어스름한 불빛 아래서 뜨문뜨문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밝은 빛을 통 바깥으로 뿜어냈다. 다시 흔들었으나 소리와 빛의 흔적이 없었다. 우선 통 안에 살아남은 녀석들이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베란다 전등이 침침해 그 안을 보기 위하여 후레쉬가 필요했다. 큰소리로 아내를 불렀다.
  106. “오빠, 어디에 있어?”
  107. “여기, 베란다야.”
  108. 아내가 베란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109. “왜? 오빠.”
  110. “가서 후레쉬 좀 가져와 봐.”
  111. “알았어.”
  112. 나는 플라스틱 통을 전기 파리채로 막고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잠시 후 아내가 후레쉬를 나에게 건넸다. 왼손으로 잡은 후레쉬를 통 안을 비추고 내려다보았다. 그 안에는 죽어 있는 나방들 때문에 안쪽 상황을 알 수 없었다.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살아 있는 나방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전기 파리채를 뗐다. 정체를 알기 위하여 그 플라스틱 통을 베란다 바닥에 쏟았다. 나방들의 사체와 함께 딸려 나온 것은 바싹 말린 귤껍질을 싼 나이론 망이었다. 그 위엔 흰 가루가 쏟아졌다. 꾸물거리는 작은 녀석들이 눈에 보였다. 좁쌀 만큼 작고 하얀 애벌레들이었다. 나방이 이곳에 알을 낳고 그 알이 부화해서 이 귤껍질을 먹고 자란 것으로 추측이 되었다.
  113. “어휴, 징그러워. 유튜브에서 골다공증에 좋다고 해서 어머니 드리려고 봄부터 말린 건데.”
  114. 아내가 변하고 있다. 징그럽다며 도망칠 줄 알았던 아내가 덤덤히 애벌레를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는가? 서로 대립만 반복해 오던 우리가 이젠 서로 의사소통이 원활히 해 낼 수 있을 것 같은 조짐이 보였다. 그런데 ‘아!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떻게 비닐로 싸인 통에 들어갔을까? 비닐과 통 사이의 비좁은 공간으로 기어 들어갔다는 말인가?
  115. “휴지 좀 가져와.”
  116. “알았어.”
  117. 아내가 휴지를 가져왔다. 나는 휴지를 손에 싸서 애벌레들을 눌러 죽였다. 이 상태는 그냥 지나칠 상황이 아니었다. 베란다에 있는 모든 것을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선반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씩 베란다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내에게 후레쉬를 비추게 하고 덮개를 열도록 요청했다. 만일 나방이 나오면 나는 전기 파리채로 입구를 봉쇄할 것이다.
  118. 우리는 연애 시절에 싸울 일이 거의 없었다. 우리는 서로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그 때처럼 손발을 맞추며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는가? 우리 가정에 빛줄기가 펼쳐지는 듯 싶었다.
  119. 하나하나 베일을 벗겼다. 다른 플라스틱 통에서도 발견되었다. 그 통은 뚜껑이 살짝 열려 있었다. 이것은 개 사료 통이었다. 이것은 아내가 길강아지에게 주기 위하여 나와 함께 간 마트에서 구입한 것이었다. 이미 나방들이 다들 떠나고 사료는 바닥이 드러났는데 가루들이 그 위에 얹혀 있었다. 그야말로 이곳이 나방의 식량 기지였던 셈이었다. 귤껍질이 들어있던 통에서 보았던 흰 가루가 애벌레가 먹고 난 찌꺼기인 줄 알았는데 이 통을 보니 애벌레들의 배설물인 것으로 추측되었다. 우리는 보일러가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의 통들은 투명한 것이어서 굳이 열어 볼 필요가 없었다. 모든 용기는 깨끗했다. 이젠 결론이 났다. 더 이상 나방이 늘어날 일이 없다.
  120. 우리는 거실로 들어섰다. 안방과 욕실을 탐색했다. 두 곳 모두 나방은 없었다. 작은 방과 거실에 날아 다니는, 우리 집에 남아있는 나방의 전부였다. 아내에게는 비교적 좁은 활동반경인 작은 방을 맡기기로 하고 거실은 내가 책임지기로 했다. 거실에서 날아다니는 나방들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았다. 아마도 공기의 흐름이 안정되어 위험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듯하다. 밤이 깊어 가므로 빨리 잡고 싶었다. 이왕 주말은 망쳤지만, 휴일인 내일을 위하여 잠만큼은 제대로 자고 싶었기 때문이다. 적극적으로 따라다니면서 잡았다. 거실을 한 바퀴 돌았다. 대략 십여 마리가 잡혔다. 그때 인터폰의 알림 소리가 울렸다. 아내가 거실로 달려 나왔다. 내가 인터폰의 통화 버튼을 눌렀다.
  121. “여기, 경비실입니다.”
  122. “예, 수고하십니다. 무슨 일이죠?”
  123. “아래층에 사시는 분이 저에게 인터폰으로 난리 치셨어요.”
  124. “왜요?”
  125. “밤에 위층에서 쿵쾅거린다고 조용히 해달하고 하네요. 좀 조심해 주세요. 저도 중간에 끼여 입장이 애매하네요.”
  126. “예, 알겠습니다. 수고하세요.”
  127. 이제는 걸음걸이마저 습도와 온도 그리고 나방들과 함께 전기 파리채에 짊어지어야 했다. 조용한 집안에서 적막을 얹고 다닐 판이니 귀신이 이 녀석들과 같은 편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128. “지연아, 이제부터는 살금살금 걸어 다니자.”
  129. “알았어.”
  130. 이젠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복병이 나타난 느낌이다. 이젠 녀석들의 비행로도 파악했고 습성도 조금은 알게 되어 녀석들을 잡는 것이 수월했는데 말이다. 어찌하든 점점 녀석들의 수가 줄어들어 여남은 마리가 남았다. 그런데 나방들의 움직임이 처음처럼 재빨랐다. 공기의 흐름을 알아챈 듯했다. 나방에게 다가가면 지그재그식으로 날았다. 그러나 한 마리씩 줄고 남은 나방은 네 마리. 녀석들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들자, 전기 파리채를 휘두르면 이 녀석들이 가구들 틈으로 들어가 버린다. 검정 냉장고 뒤로 한 마리가, 은색 냉장고에 또 한 마리가 그리고 소파 뒤로 두 마리가 숨었다. 참으로 난감했다. 그때 아내가 거실로 나오면서 말했다.
  131. “나는 다 잡았어. 오빠도 다 잡았나 보네.”
  132. “아니야. 이것들이 가구들 틈 곳곳으로 들어가 버렸어. 정말 환장할 노릇이다.”
  133. 녀석들이 나오길 기다렸다. 별달리 방법이 없었다. 냉장고와 소파를 다 들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기다리며 두리번대다가 거실 바닥을 보았다. 죽은 녀석들의 사체와 함께 거실 바닥이 하얀 먼지로 가득했다.
  134. “지연아, 바닥에 하얀 먼지를 닦아야 겠는데.”
  135. “정말, 먼지가 어디서 생긴 거지.”
  136. “지연아, 먼지가 아니야. 꿈틀대는데.”
  137. 하얀 정체를 알아보기 위하여 거실 바닥을 가까이서 살폈다. 아까 베란다에서 플라스틱 통 안에 있던 것과 같은 종류의 애벌레였다. 거실 바닥은 녀석들로 하얗게 도배되어 있었다. 영화에서나 봄 직한 전쟁 신처럼 군사들이 한꺼번에 서로 몰려서 달려드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였다. 주방에서 꿈틀대며 향한 곳은 베란다였다. 아내는 소리치며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식탁에 놓인 휴지를 손에 감고 거실 바닥을 훑으며 으깼다. 셀 수 없이 많은 애벌레지만 크기는 작고 움직임은 느려서 처리하기는 수월했다. 이 녀석들이 나온 곳으로 추정되는 주방을 살펴야 했다. 주방 수납장들을 모두 열었다. 그릇들을 일일이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예쁜 꽃무늬가 조각된 작은 사기그릇을 안을 보았다. 거기에는 호두가 있었다. 호두는 반 개 정도였고 하얀 가루가 옆에 있는 것으로 보아, 어느 나방이 이곳에 알을 낳았고 열병을 지어 베란다로 향하던 애벌레 녀석들이 이 호두를 먹었던 것으로 추측되었다. 앞으론 먹다 남은 음식들을 잘 관리해야 할 듯 싶었다. 주방 수납장의 모든 그릇을 일일이 확인했다. 나머지 것들은 모두 깨끗했다.
  138. 애벌레 녀석들 때문에 나머지 네 녀석들의 행적을 놓쳤기 때문에 다시 온 집안을 탐색했다. 날아다니는 녀석은 없었다. 거실 한가운데 서서 녀석들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아무리 기다려도 녀석들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삼십여 분이 흘렀다. 적막한 가운데 긴장감도 없이 시간만 흘렀다. 나는 거실을 두리번거리며 아내를 불렀다.
  139. “지연아, 다 치웠어. 나와봐.”
  140. 아내가 거실로 나왔다.
  141. “도대체 이 녀석들의 정체가 뭔 지 검색 좀 해봐라.”
  142. 아내를 슬쩍 쳐다보니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린다.
  143. “검색어를 무엇으로 할까? 아하, ‘집 나방’으로 해보자.”
  144. 아내는 영민하니 정체를 밝히리라. 아내가 한참을 스마트폰의 액정과 씨름하더니 결론처럼 읊조린다.
  145. “이 녀석들, 이름이 ‘쌀벌레’고 정식 명칭은 화랑곡나방이야. 가만히 보자···, 화·랑·곡·나·방.”
  146. 아내는 다시 한참을 스마트폰에 눈을 박고서 나를 향해 몸을 돌리더니 설명하기 시작한다.
  147. “곡식은 물론 한약재와 영양제 그리고 감기약까지 먹는다네. 라면 봉지도 뚫고 들어가 먹고 더 이상 먹을 것이 없으면 동족 포식까지 한다네.”
  148. “정말 지독한 놈들이네. 바퀴벌레 못지않다.”
  149. “정말 무섭다. 유충으로 사는 기간도 조절한데, 이 주에서 삼백일 가량을. 유충으로 오래 살아도 다른 것들과 동일한 수명을 산다고 하고.”
  150. “바퀴벌레는 양반이네. 바퀴벌레는 보이지나 않지.”
  151. “지금이 이것들 제철이네. 섭씨 십오 도에서도 부화와 성장이 이루어지고 따뜻한 곳에서는 부화율이 급증한데. 암컷 성충 한 마리가 들어오면 한 달 후에 백 배로 불어난데.”
  152. 얼마 전에 베란다에서 바깥 풍경을 볼 때 벽에 앉은 나방 한 마리를 손바닥으로 잡은 것이 떠올랐다. 그때 이 상식을 알았으면 좋았을 것을. 뒤늦은 후회가 땀이 되어 돌아왔다. 몸이 축축해 내려다보니 습도와 기온이 극성을 떠는 상황에서 여기저기를 헤맨 탓에 이미 속옷은 살을 훤히 내비쳤다. 아내의 옷도 다 젖어 브래지어가 훤히 보였다.
  153. 이렇게 대화가 이어지는 중에도 녀석들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눈은 거실 곳곳을 누비고 있었다.
  154. “그런 것 말고 어떻게 해야 이놈들을 없앨 수 있는지 찾아봐.”
  155. “응, 지금 그 대목을 읽고 있어. 그러니까 암컷의 페로몬을 내는 끈끈이를 설치하면 수컷들이 이 냄새를 맡고 끈끈이에 걸린 다네.”
  156. “이것들을 빨리 없애야 할 텐데. 도무지 나오질 않으니. 이것들도 나방인데 불을 좋아하지 않을까? 그런 것은 안 나와?”
  157. “음, 잠깐. 빛을 따라다니지는 않는다고 하네.”
  158. “참으로 난감하다.”
  159. 한 시간이 흘렀다. 도무지 나올 낌새가 없었다.
  160. “지연아, 오늘 그냥 씻고 대충 치우자. 그리고 자고 난 다음 내일 ‘끈끈이’를 사오는 것이 낫겠다. 이러다 해 뜨겠어.”
  161. 이 녀석들을 몰랐으면 몰라도 안 이상 잡아야 하지만 어찌할 수가 없다는 것이 찜찜하게 만든다. 쉽게 잠이 올지 두렵기까지 하다.
  162. “그러자. 근데 오빠, 우리도 아이를 하나 키우자.”
  163. “그게 무슨 소리야?”
  164. “이 화랑곡나방의 생태를 보니 우리 가정을 지키려면 가족 수를 늘려가야겠어. 그 어떤 것도 우리 가정을 넘보지 못하게.”
  165. “지연아, 고맙다.”
  166. “오빠, 그동안 미안했어. 그리고 사랑해.”
  167. “지연아, 나도 진심으로 사랑해.”
  168. “내일 진지하게 우리 가정에 대하여 대화하자. 이 녀석들을 보니 우리도 싸우지 말고 똘똘 뭉쳐야 되겠어.”
  169. “나야 대 찬성이지. 근데 지연아, 날벌레라면 기겁을 하던 네가 어떻게 나방을 잡을 결심을 한 거야.”
  170. “오빠가 혼자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녀석들을 잡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오빠가 누워서 무릎을 만지면서 고통스러운 표정을 보고 나니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면서 용기가 나더라.”
  171. “지연아, 고맙다.”
  172. “나, 이제는 벌레가 무섭지 않을 것 같아. 오빠가 먼저 씻어.”
  173. “아니야, 너 먼저 씻어.”
  174. “오빠, 잠깐. 이놈들이 쌀벌레잖아. 쌀통도 확인해 보자.”
  175. 그 말을 듣는 순간 현기증이 이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벽을 넘는 기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오른쪽 무릎이 쑤셨다. 내일도 이 사태가 해결되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숨어있는 나방, 네 마리 때문에. 우리는 베란다로 나가 후레쉬를 비추고 황토로 된 쌀통의 뚜껑을 열었다. 두 마리의 나방이 탈출하려는 것을 마저 잡았다.
  176. 아내는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가고 나는 작은 방으로 가서 모니터를 보았다. 바둑은 끝났다. 메시지 창은 내가 시간 패했다고 알렸다. 가만히 바둑판을 물끄러미 보았다. 각각의 말들이 쫓고 쫓기며 이어지는 것이 꼭 유기체들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바둑은 패하더라도 다시 둘 수가 있다. 자연 세계에서 패한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이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우리가 기를 쓰며 나방을 죽인 것처럼 나방도 살아남기 위하여 기를 쓰고 지금처럼 진화해 온 것이리라. 그런데 오늘 화랑곡 나방과 치열히 싸우면서 기시감이 들었었는데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가자지구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모든 가정에는 젖과 꿀이 흐르기를 고대하며 가자지구에는 인간의 존엄성을 위하여 양보, 배려 그리고 양심이 넘쳐나는 자비가 가득하기를······.
  177.